나의 이야기

차꽃 피면 만나리 - 김현호 시집 출간 2017. 12. 14.

참빛사랑 2017. 12. 14. 21:38




차꽃 피면 만나리  김현호 시집



차례


시인의 말 7


제1부 꿈꾸라


사진과 시와 나 14

그림을 그립니다 15

사진 덕 있는 사람 16

추억 가두리 17

트리밍 18

만남 19

내 안에 있는 나 22

헛수고 23

꿈꾸라 24

시온의 영광 25

이안의 봄 26

고예은 28

여름 아이 하준에게 29

뜨거운 사랑 30

틈새 31

톱 32

나의 아바타 34

죽산길 백룡 36



제2부 늘 그리운 바다


동율항 등대 38

늘 그리운 바다 39

율포에서 40

금형 41

통장 42

중삼이 아제 43

하나쯤이야 44

향기로운 날 45

세량지 46

석류 47

도강에 묻힌 소리 48

껄 50

다짐 52

감자꽃 53

순천만 낙조 54

기다리는 마음 55

어찌 하모니카 56



제3부 아름다운 영혼


아름다운 영혼 58

계뇨등 59

빛으로 오신 주님 60

십자가 62

나의 소유권 63

행복한 염색사 64

영수증 65

벚꽃 피는 사월에 66

비나이다 67

내 시간의 끝 68

꽃 도둑 69

소록도의 봄 70

떠나가네 72

선한 양심 74

삶다 75

무술목 사랑 76

홀가분 77

동트기 전 78



제4부 보성의 사계


녹차를 마시는 것은 80

보성차밭 82

황홀한 새벽 83

차밭의 목련 84

청명차 만드는 날 85

미미보 보물성 86

차꽃이 피면 90

월하끽다月下喫茶 91

실화상봉實花相逢 92

차밭에 눈이 내리면 93

회천쪽파 94

회천감자 95

보성덤벙이 96

처녀바위 97

펜션 98

일림산 철쭉 99

가리실 노동 100

초암산 철쭉 102

보성평생대학 교가 103

행복한 걱정 104

지금은 거울 106

▪발문|감자꽃처럼 희고 순정한 겸애의 시/ 유홍준 107




시인의 말


사진이 빛으로 그리는 그림이라면

시는 문자로 말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리라

내게 있어 글쓰기는

곤고한 나를 다잡아 격려하고 위로하고

때론 채찍질하여 세워가는 도구가 되어주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첫 시집을 세상에 내어놓는다

시가흐르는행복학교에서

시 창작을 가르치시고

글쓰기의 기초를 다져주신

교수님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궁핍함 속에서도 묵묵히

4남매를 기르고 가르친

아내가 늘 고맙다

더 큰 사랑으로

때를 따라 도우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2017. 가을

김 현 호




- 발문


자꽃처럼 희고 순정한 겸애의 시


유 홍 준 (시인)




1. 허영을 버린 겸허


“사진이 빛으로 그리는 그림이라면/시는 문자로 말의 그림

을/그리는 것”. 우리는 이 단정적 ‘시인의 말’을 통해 그가 사

진을 찍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시를 쓰는 사람임을 금방 알아

챌 수 있다.

전라남도 보성군 회천면. 시집 원고를 받아들고 나는 그가

사진을 찍고 시를 쓰고 생업을 꾸려나가는 구체적 공간(참빛

사진관)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시가 흐르는 행복학교’ 수

업을 마친 즈음이었고 마악 어둠이 내린 시간이었다.

환한 전등 아래 그는 옆모습이거나 뒷모습이었다. 근자에

찍은 사진들을 매만지고 있는 듯했다. 행동들이 크지 않았고

침착했고 말이 없었다. 도무지 이 순정 백 퍼센트의 시편들

을 앞에 두고 나는 무어라 말을 풀어나가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그의 시들은 현대시의 영역을 애초에

비켜나 있거나, 아예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듯 보였다. 시에

서도 현실에서도 그는 별말이 없었다.

그의 공간 안으로 들어서지도 못하고 길 건너 어둠 속에

숨어 환한 전등 아래 그를 훔쳐만 보았듯이 이 글 역시 아마

그런 모양새가 될 것이다. 그의 내부가 아니라 겉모습 일부

만을 가까스로 읽어낸.


화분이 자꾸 없어졌다

꽃을 너무나 사랑한 누군가

꼬셔 데려간 걸까

어느 땐 화분은 두고 꽃만 쏙 빼갔다

그 후로 아내는 볼만한 화분은

가게 앞에 내놓지 않았다

꽃을 훔친 마음에도 꽃이 필까


어느 날 거리에 CC 티브이 설치되었다

졸지도 않고

밤낮 오가는 사람들 보고 있다

향기로운 꽃 내놓아도 이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누군가 보고 있다

너를 지켜보고 있다


-「꽃 도둑」전문


시인의 ‘참빛사진관’ 앞에 놓인 화분만 멍하니 바라보다 돌

아와 버린 게 몇 번, 나는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사진작가이며 동시에 시인인 그를 읽어낼 그 무엇을 찾기 위

해서였다.

‘설명될 수 없는 그 무엇(Punctum)’이 아니라 시인의 시들

은 스투디움(studium)의 세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다. 그것

이 나를 더 어렵게 했다. 현대시는 푼크툼의 영역이고 나 역

시 거기에 익숙해져 있는데 느닷없이 스투디움의 시들을 받

아드니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이다.

“삶이란 이처럼 작은 고독의 상처들로 이루어졌다(la vie

est ainsi faites a coups de petites solitudes)”는 롤랑 바르트

식 비평으로 이 시들은 재단할 수도 판단할 수도 없었다. 그

의 시는 분열도 해체도 아니며 혼란도 아니었다. 언어미학에

집중하고 있지도 않았고 팽팽한 긴장(tension)을 갖추고 있지

도 않았다.

시인의 시들은 사회와 제도가 요구하는 대로 똑바로 세상

을 사는 자의 소산이었고 특히 신앙이 요구하는 기준을 벗어

나 있지 않았다. 그의 신실한 믿음은 아예 ‘또 다른 상처 자

국’을 들여다 볼 이유조차 없는 것 같았다.


놓쳐버리면

좀처럼 오지 않는

아름다운 순간포착

그 안에 나 없어도

사진 밖에 내가 있다


-「사진과 시와 나」부분




시인은 늘 말이 없다. 화를 내는 것 같지도 않고 웃는 것

같지도 않다. 조용하고 온화할 뿐. 시인은 상처 안에 머물지

도 않고 사진 안에 머물지도 않는다. 그는 타자를 찍는 사람

이고, 타자를 배려하는 사람이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삶이 아

름다워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사랑으로, 미소로/ 렌즈 앞에 있는 당신/ 하나님 보

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신/ 아름다운 사람/ 고귀한 사람

(「사진 덕 있는 사람」)이다.’ 파인더에 한쪽 눈을 대고/ 윙

크한다// 한쪽 눈 감은 대신/ 마음의 눈을 뜨고/ 인생은 흘러

가고/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추억 가두리」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는 사진관을 운영하며 처자식을 부양하고 건사하는 자신

에 대해 자긍심이 대단한 사람이다. 그는 그 외의 것은 다 잘

라내어 던져버렸다.


버려야 한다

손톱을 자르거나

이발하는 것처럼

잘라내 버려야 한다


사진이든 시든

없으면 죽을 것 같은

거시기만 남기고 싹둑

욕심을 버려야 한다


-「트리밍」전문


사실 쓰는 것보다 어려운 게 퇴고. 고쳐나가는 일이다. 어

디 시뿐이겠는가. 사진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고 우리의 삶

또한 그렇다. 오류의 연속이고 실수의 연속이어서 우리는 머

리를 쥐어뜯으며 후회하고 더러는 혼자서도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한다.

시인이 시 속에서 지적했듯 손톱을 자르고 이발을 해야 하

는 건 신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트리밍하도록 한 것. 시도 인

생도 잘 쓰고 잘 사는 사람들은 싹둑, 잘 잘라낼 줄 아는 사

람이다. 습작기에 있는 시인 지망생들은 한결같다. 자신이

쓴 문장에 대해 애착이 많다. 더 보태려고 할 뿐 버릴 줄을

모른다. 그런데 시 잘 쓰는 사람들은 버린다. 일말의 미련도

없이 사족을 버리고 군더더기를 버리고 겉치레를 버린다. 욕

심을 버려야 시도 살고 인생도 산다. 짐작건대 시인은 사진

작업을 통해 그것을 체득한 듯하다. 자신의 삶에도 시에도

트리밍이 적용된다는 것을.



2. 가족에 대한 사랑의 지극함


시인의 가족에 대한 사랑은 보통사람의 수준을 넘어선다.

세상사 많은 것에 욕심을 버리고 덜어냈지만, 가족에 대한

사랑만큼은 보태고 또 보태온 것이다. 시인의 나이 이순. 손

주들에 대한 사랑이 쏠쏠하다. 그는 35년 사진관 홑벌이로

네 자녀를 대학까지 보낸 사람이다. 세 딸을 결혼시키고 몇

명의 손주까지 본 사람이다. 신앙이 그의 사명이라면 가족에

대한 그의 사랑은 의무이자 숙명이다.



딸 딸 딸 아들

유치원 초 중 고등학교 대학교

한 아이 대학 보내기도 버겁다는데

소도 없고 비빌 언덕도 없고

논밭 한 뙈기 없었지요.


-「하나쯤이야」부분



시인은 “살면 살아져야” 하시던 옛 어른들의 말씀을 상기

한다. ‘밑 빠진 독처럼/ 구멍 난 자루처럼/ 그렇게 다 빠져나

가 버리는 자동이체 내 (「통장」)’에서처럼 삶의 고달픔을

토로한 시가 없지는 않지마는 이 겸손과 겸허와 감사의 시인

은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의 굽이굽이 다/ 주님의 은혜 알뜰

한 아내 덕분이었’다고 술회한다. 시인의 시가 ‘돌아온 탕자

의 간증’이 아니어서 일견 아쉬운 감이 없지는 않지마는 평소

의 그의 삶과 태도를 생각한다면 이 겸허와 감사의 시편들은

충분히 납득이 가고도 남는다.

그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도 물들이는 사람이다.


함께 걸어온

험한 세월 흔적으로

머리 위에 내려쌓인 서릿발

내 탓만 같아서 안쓰러운 마음으로

당신의 머리에 고이 색칠합니다


나는 그대의 센 머리카락

곱게 물들이는 행복한 염색사


두 가지 염색약 섞어

당신과 나 하나된 것처럼

곱게 어우러지면

당신의 머리에 그림을 그립니다


한 달에 한 번

당신의 머리에 붓질하고 나면

찬 서리는 다 녹아 사라지고

자연 갈색으로

십 년은 젊어진 당신


-「행복한 염색사」전문



앞서 사진작가이며 동시에 시인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시인

을 소개했었다. 그러나 이쯤 되면 그의 직업을 또 하나 보태

소개할 수 있을 듯하다. ‘행복한 염색사!’ 글쎄, 내 아직 새치

가 그리 많지 않아 염색해 본 적이 없지마는 부부간에 이렇

게 서로 염색을 해주는 이가 얼마나 될까 싶다. 부자로 살지

않아도,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이 정도 되면 시인의 아내는

정말로 행복하시겠다.

시인은 ‘우리의 육체는 그릇이다/ 아름다운 영혼을 담는/

위대한 토기장이의 걸작이다/ 능력의 손길로 그분의 형상을

따라 빚어낸/ 눈부시게 아름다운 꽃병이다(「아름다운 영

혼」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부인에 대한 사랑뿐이 아니라 손주들에 대한 사랑 역시 지

극하다. 시인의 시에는 태중에서 ‘이레’라 불렸던 아이가 나

오고 태명이 ‘봄’과 ‘텐텐’인 아이들이 나온다. 하이안, 고예은,

박하준이 그들이다. 성씨가 모두 다른 거로 보아 아마도 세

딸들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인 듯하다.


시에 비춰보면 어떤 아이는 ‘입추 지난 첫새벽’에 태어났고

어떤 아이는 ‘봄빛 하늘 푸르디푸른 날’ 태어났고 ‘자귀나무

꽃피어 환희로운 계절’에 태어났다. ‘평안을 끼치는 사람이

되어라, 강물처럼 도도히 흐르거라, 고마운 사람, 예쁜 사람,

은혜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거라’, 그는 이 아이들에게 하나 같

이 축복하고 당부하고 기대하고 있다.


자귀나무 꽃피어 환희로운 계절

두근거리며 기다린 끝에

텐텐이라는 태명의 아기가

새벽을 깨우며 우리 곁에 왔다


카톡으로 미리 본 네 모습

2.3kg 쪼그만 몸으로 태어났지만

똘망똘망 앙증맞은 나의 외손녀


자식보다 손자 손녀 예쁘단 말 참말이구나

미리 지어놓은 너의 이름 고예은


고마우신

예수님

은혜에 감사합니다


고운 아이로

예쁜 아이로

은혜로운 아이로 무럭무럭 자라거라


고마운 사람

예쁜 사람

은혜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거라


-「고예은」전문



시인은 손주들에 대한 내리사랑을 아낌없이 드러낼 뿐 아

니라 부모님에 대한 효심 역시 지극하게 드러낸다. ‘네 부모

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

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애굽기)’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

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

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에베소서)’는 종교를 떠나 우리가 거의

다 알고 있는 구절. 아마도 시인은 세상의 모든 기준, 판단을

성경에 의지해 내리는 것 같다. ‘84년 지구별 여행을 끝내고

(「기다리는 마음」)’ 떠나간 장모님의 죽음을 기리기도 하고

구순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노후를 못내 안타까워하기도 하는

것도 그 선상에 있다. 그렇다. 가족 사랑조차도 내림이다. 시

인의 나이 이순. 머잖아 노후를 맞을 것이고, 네 자녀들이 분

명 시인을 잘 공경할 것이다.


어머니는 여행용 가방에 옷가지와

한 아름 약봉지를 챙겨 넣었습니다

가방 등어리에 아버지가 즐겨 부시던

하모니카를 넣고 행여나 빠질세라

지퍼를 꼭 잠갔습니다

57세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어머니

“불효자는 웁니다” 부르고 부르던

낡은 하모니카, 가방 속에 갇혔습니다

연로한 어머니

구순 바라보는 아버지 건사까지 하려니

이제는 힘들어 못 하겠다 하십니다

요양원에 보내 달라 하셨습니다

7남매 아무도 모실 이 없어

바퀴 달린 지게에 싣고 가

백운산 600고지에 내려 두고 왔습니다

자식들 가슴 고구마 먹고 체한 듯 답답한데

어머니 날마다 전화하여 고맙다 고맙다

천국같이 좋으니 걱정 말라 하십니다

그래도 어찌하오리까

아버지 하모니카 소리 다시 들으면

체한 가슴 사르르 녹아내릴까요


-「어찌 하모니카」전문




3. 고향에서 쓴 시


지난봄, 나는 ‘시가흐르는행복학교’ 이사장인 이창수 시인

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강의를 좀 와 달라는 부탁

이었다. 시가 흐르는 행복학교는 들어 알고 있었지만,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하는 곳인지는 알지 못했다. 더군다나 전라남

도 보성은 어디쯤일까, 나는 가늠이 잘 안 됐다. 보성 차밭,

그것은 텔레비전이나 사진으로만 본 것일 뿐, 여행을 잘 하

지 않는 나에겐 생소한 곳이었다.

시가흐르는행복학교 첫 수업 날, 나는 야릇한 기대와 설렘

으로 30여 명 수강생을 바라보았다. 내 소개를 했고 이윽고

수강생들의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김현호’라고 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왠지 익숙한

얼굴이 하나 있었다. 지금 와 말이지만 우리 고향 누군가와

닮은 모습이었다.

사진작가라고 했고 교회 장로라고 했다. 등단했다고 했다.

죄송하지만 사진작가는 마음에 들었고 장로는 마음에 안 들

었다. 장로님이라니! 시 쓰기는 영 힘들겠군, 하는 게 솔직한

내 짐작이었다. 시인은 좀체 말이 없었고 온화만 미소만 지

어 보였다. 그의 곤색 폭스바겐 승용차가 눈에 익을 무렵이

었다. 두어 달이 지났을 때였다. 그가 조심조심 시 한 편을

합평회에 내놓았다.


용을 보았다

해마다 사월쯤 주암호에서 나오는 백룡

길이가 자그마치 십오 리다

그 용 죽산길 따라 굽이치며 천봉산 오르고


사람들 걷거나 자동차 타고 용 뱃속으로 들어간다

나도 사람들 따라 그 속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용 뱃속에서 사진 찍는다

환한 얼굴 스마트폰에 담긴다

용에게 먹히고도 탄성 지르는 사람들

먹히고도 먹힌 줄 모른다


봄마다 그 용 승천하려 애쓰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죽산천 거슬러 오르지 않고

죽산길 따라가다가

하얀 비늘 다 벗겨져 죽고 만다


-「죽산길 백룡」전문



아이쿠, 제법이었다. 아주 기발하거나 산뜻하지는 않았지

만, 구불구불 시오리 벚꽃 길을 바라보며 ‘백룡’을 연상한 것

이 괜찮아 보였다. 사람들도 자동차도 다투어 용의 뱃속으로

들어가려 애를 쓰고, 용의 뱃속에서 사진을 찍고 웃고 떠들

고 탄성을 지르며 즐거워한다는 것도 재미있었다.

「죽산길 백룡」, 그것은 봄마다 죽산길에 벚꽃이 피는 것

은 용이 승천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그 용

은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하얀 비늘 꽃잎이 다 떨어져 죽고

만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 시에 점수를 더 준 것은 사실 다른 이유에

있었다. 교회 장로라는 그의 직분을 감안한다면 이 시는 매

우 예외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이 말은 하진 않았

지만 하여간 그랬다. 나는 그가 신앙과는 무관하게 시를 대

하고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죽산길 백룡」은 승천을 못 하는 게 아니

라 안 하는 건지도 모른다. 자신의 뱃속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

이 들어와 웃고 떠들고 하니 어찌 이 인간 세상을 떠나고 싶겠

는가 말이다. 좌우지간 시는 이 오염되고 찌든 세속의 몫.


갯바람에 감자꽃 흔들릴 때면

회천의 황토밭은 알을 낳는다


대지마는 튀기면 바삭하고

추백은 조리면 쫀득하다


선농은 사랑 같아서

식으면 무덤덤하고


수미는 쪄먹어야 제맛

호호 불며 보근보근

뜨거울 때 먹어 보게


금순아 감자 삶아라

회천감자 삶아라


-「회천감자」전문



시가 흐르는 행복학교 사람들과 두어 달 낯이 익어갈 무렵

이었다. 그중 몇몇이 식사를 하자고 했다. 주로 광주에서 보

성까지 공부하러 오는 이들이었다. 엉거주춤, 거절도 사양도

못 하고 나는 그들을 따라나섰는데, 어럽쇼, 내 가야할 방향

의 반대편 고개를 넘어 내리닫이 자꾸만 아래로 내달려 가는

것이었다.

봇재라고 했다. 저 아래 바다가 있다고 했다. 회천 바다라

고 했다. 율포라고 했다. 김현호 시인이 살고 있는 곳이라 했

다. 회천감자가 유명하다고 했다. 마침 감자꽃이 피던 철이

었다. 누군지 모르겠다. 회천감자는 아주 유명한데 그걸 모

르냐고 마치 퉁박을 주듯 말했다. 맞다. 회천감자는 나에게

그렇게 각인이 되었다.

대지마, 추백, 선농, 수미……. 그 옛날『농업』이라는 교

과서에 나오는 것들을 외우듯 나는 읊조려본다. ‘회천의 황토

밭은 알을 낳는다’. 재미있다. 시인의 시들은 고향 이야기를

할 때 보근보근하고 쫀득하고 때론 무덤덤하다.

그는「회천쪽파」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김장이란 영

화에/ 조연이 되기도 하지/ 그렇다고 조연만 하진 않아/ 파김

치 파절임 파무침/ 파숙지 파전에선 주연이지/ 고단한 삶도

파전처럼 역전할 수 있어.’

그렇다. 시인은 주연이다. 고향에서 그는 당연히 주연이다.

그는 주연이 되어 고향의 곳곳을 노래한다. 율포해수욕장 동

쪽 끝에 있는「동율항 등대」, 회천면 소리 성지 마을, 송계

정응민 선생의 생가가 있는「도강」, 보성 삼베의 맥을 이어

가는 마광(麻狂) 이찬식 선생을 기리는「삶다」, 활성산 오선

봉 삼나무 숲을 노래한「황홀한 새벽」, 의(義) 예(藝) 다(茶)

말고도 보물이 많아 보성강 주암호 제암산 존제산 제석산 초

암산 일림산 계당산 열선루 백사정 회령포 장군재 득량만 백

사청송 율포를 노래한「미미보 보물성」, 시인 문정희의 고

향이자「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작가 양근승 생가가 있는 비

안함노(기러기가 갈댓잎을 물고 난다는 의미)의 고장 노동면

을 노래한「가리실 노동」, 도예가 삼전 송기진 선생을 노래

한 「보성 덤벙이」, 「처녀바위」, 등 고향을 노래한 시들은

일일이 다 열거할 수가 없을 만치 많다. 문덕면민회 주최 대

국민 헌수운동에 동참한 얘기까지.

시집에 실린 시 대부분이 그렇다. 신앙인으로서의 시편들

과 가족에 관한 시편들을 제외하면 거의 고향을 노래한 시들

이다. 사실 나는 이것이 못마땅하기도 하다. 기껏해야 시인

의 시들은 화순 세량지, 고흥 소록도, 순천만 갈대밭, 진도

다시래기, 여수 몽돌밭 무술목 등에 머물고 있다.

아니다. 달리 말하면 이것은 그가 생활인으로서 신앙인으

로서 얼마나 열심히 살았던가 하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그와 그의 시를 이해하는 단초이기도 하다. 시인에게도

왜 후회와 미련과 아쉬움이 없겠는가.

나이 이순에 빈말이라도 주고받지 못하고 훌쩍 세상을 떠

나버린 친구「껄」이 있고, 목소리는 우렁찼지만 닉네임으로

봐 순정한 사람이었을 아우「감자꽃」의 죽음이 있다. 손톱

달 기를 쓰고 밀어 올려도/ 지워지지 않는 꽃물「다짐」첫사

랑이 있다. 삶의 터전이자 시와 사진의 터전. 하여간 시인은

결코 고향 회천을 떠나지도 벗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밀려오는 파도에

흔적 없이 사라질 줄 알면서도

그 이름 바라보며 하하 웃는다


물 지우개 휩쓸고 지나간 자리

그 자리에 그대 이름

다시 쓰리라


-「율포에서」부분




4. 욕심 많은 시인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싹둑 잘라내 버려야 하는「트리

밍」을 통해 나는 시인이 시도 사진도 인생도 버릴 줄 아는

이치를 느낀 것 같다고 했다. 아니다 그런 것 같지만 꼼꼼히

읽어보면 시인은 욕심이 엄청 많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욕심이 많다니! 시인은 펄쩍 뛸지도 모르겠다. 아니 사실

그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을 것이

다. 지인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원고를 읽어나가는 중 나에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시인 참 욕심이 많네, 라는 생각이었다. 주님을 향한 욕

심, 가족을 향한 욕심, 고향을 향한 욕심……. 하여간 시인은

욕심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다. 맞다. 시인에게 삶은 지워

지거나 비워지는 게 아니라 채워지고 새겨지는 것이다. 따지

고 보면 기실 사진을 찍는 일 또한 그런 것일 것이다. 지우는

것이 아니라 새기는 것일 거다.

시인은 결국 자신의 삶이 ‘늘 푸른 차밭에 눈 내린’ 것 같

기를 소망한다. ‘굽이진 설국의 오솔길에/ 새겨진 발자국처럼

/ 나그네 인생길/ 걸어온 흔적// 하얗고 깨끗하게 새겨졌으면

(「차밭에 눈 내리면」)’ 한다.「행복한 염색사」에서 아내의

머리카락을 염색해 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찾아보면 시인의 욕심은 시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는

‘물 지우개가 아무리 지우고 지나가도 그 자리에 다시 제 이

름을 쓸’ 사람이다. 그는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무지갯빛 꿈

꺼내어/ 그림을 그리고픈’ 사람이다. 그가 찍은 사진들은 모

두 ‘빛으로 그린 아름다운 그림’이다. 그렇다. 시인 김현호를 ‘희

망의 시인’, ‘긍정의 시인’, ‘새벽의 시인’이라 불러도 되겠다.

새벽 이미지는 그의 시집 전반에 걸쳐 있다. 시인에게 새

벽은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이 마악 오려는 새벽이고 황

홀한 새벽이다. 새벽은 희망이고 부활이다. 꿈이 실현되는

시간이다. 손주들이 태어난 시간이고 출사를 나간 작가가 마

침내 기다리고 기다린 한 장면을 만나는 시간이다.


밤새 그물질 했다

물고기 한 마리 건지지 못하고 날이 밝았다

시몬처럼 때론 헛수고할 때가 있다


허망하지만

헛수고에 믿음을 더하면

헛수고는 이미 헛수고 아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 내린 시몬

만선의 기쁨 누렸다


세상에 헛수고란 없다


-「헛수고」전문




이력을 보았더니 시인은「보성평생대학 교가」및 찬양곡

작사를 열다섯 편이나 했다고 한다. 참 욕심이 대단하다. 그

러나 주지할 것은 시인 김현호의 욕심은 부정으로서의 욕심

이 아니라 긍정으로서의 욕심. ‘꿈꾸는 자 앞에서는/시간도

세월도 그저 숫자일 뿐/꿈은 늙지 않는(「나의 아바타」)’다.

그에게는 지척에 있는 바다마저도 ‘기다림이다/ 희망이다/ 꿈

(「그리운 바다」)’이다.

그에게 새벽은 ‘진땀나는 어려운 일 하나/끝내고 나면’

「홀가분」해지는 것이다. ‘새벽 날개를 치며 비상하는 새 같

이/날아갈 것 같은 기분’인 것이다.

좌우지간, 원고를 읽으며 아쉬운 점이 하나 있었는데, 다름

이 아니라 타자에 관한 관심이 거의 없거나 부족하다는 것이

었다. (아마도 이것은 앞으로의 과제가 될 것이다) 시는 객관

적 상관물을 통해 나와 타자, 세상을 관조하고 직관하는 일

이다. 시는 깨달음도 아니고 설교도 아니고 기껏 제 아픔 따

위나 토로하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매사에 감사하는 것,

그것도 아니다. 시는 이 세상에 대한 통찰이고 사유이다. 그

리고 무엇보다 언어 미학이다.

김현호 시인의 이번 시편들이 ‘푼크툼’의 세계에까지 가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운 점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의 시들

은 아직 ‘스투디움’의 세계에 머물고 있다. 세상에 균열을 내

고 그 내부를 들여다보는 일, 그것은 무한긍정 이 감사의 시

인에게는 애초에 무리일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너무 좁고 뾰

족하기 때문에, 미메시스(mimesis)와 교차하는 지점의 언어

에 시인의 시들은 다가서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격렬함을

지향하지 않는 그의 시들은 그것을 끝내 외면하려 들지도 모

른다.

그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떤가. 이 막무가내의 더럽고 고통

스럽고 추한 세상에 시를 붙잡고 사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

을. 형님. 부족한 글 용서하시고 ‘월궁항아 다소곳이/ 찻 자

리에 내려앉’는 날 ‘율포해변 솔밭 사이/ 차향 솔솔 피어날

제’「월하끽다月下喫茶」한 잔 나눕시다.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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