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양가랭이재

참빛사랑 2024. 11. 27. 16:05

양가랭이재 김현호 (단편소설)

이 이야기는 문화 600 인생한컷 사업 중에 들은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단편소설이다. 등장인물의 이름과 지명은 실재와 다르게 기록하였다. 양가랭이재는 순천시 송광면과 보성군 문덕면 사이에 있는 재의 이름이다.

 

 

 

택한 길

 

 

우리 삶의 순간순간은 선택의 연속이다. 박덕임은 순천 송광면 감나무골에서 자랐다. 나이 열아홉이 되었을 때였다. 덕임은 혼담이 오가던 신랑감 중에 호감 가는 청년 염명곤을 택하여 결혼하게 되었다. 1958년 꽃피는 봄날 양가랭이재 넘어 문덕 귀산으로 시집와 살았다. 명곤은 오두막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시집이라고 와서 보니 가난해도 그렇게 가난할 수가 없었다. 부엌 한쪽에 깨진 쌀독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그 독 안에 들어 있는 건 쌀 몇 홉뿐이었다. 이런 데서 어찌 살까? 싶었다. 손바닥만 한 논밭이 있다지만 세 식구 식량도 부족할 판이었다. 살아나갈 일을 생각하니 막막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에 사는 강동댁이 덕임을 불렀다.

새댁, 나랑 같이 개기장시 한번 안 해 볼랑가?”

내가 그 질을 훤이 안게 개기를 띠어다 폴먼 밥 굶을 일은 없을 거여.”

문덕이 산중이라 읍내 어물전에서 생선을 떼어다 팔면 수입이 짭짤하다는 것이었다. 강동댁은 오래전부터 그 일을 해오고 있는 베테랑이었다.

새댁은 젊응께 개기 다라이 이고 댕기는 건 일도 아닐 것이여.”

그리하여 덕임은 강동댁을 따라나서게 되었다. 커다란 대야를 머리에 이고 동네방네 다니며 생선 장사를 하였다. 값은 돈으로 받기도 하고 쌀이나 보리로 받기도 했다. 무거운 생선 대야를 이고 다니며 장사하려니 꽤나 힘이 들었다. 그래도 강동댁 말대로 수입은 괜찮았다. 나중엔 이골이 나 떡 장사도 해보고 별의별 장사를 다 해 보았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도 재산은 좀체 늘지 않았다. 그 통에도 식구만 점점 늘어갔다. 남편 명곤과의 사이에 삼남삼녀를 낳았다. 삼남삼녀 중에 유독 셋째 아들 정기는 똑똑하고 수말스러웠다. 준수한 외모에 손재주가 뛰어났다. 정기가 문덕중학교 3학년 졸업반이었을 때였다.

엄마 우리 담임선생님이 낼 학교에 오시락 하네요.”

진학상담을 오라는 것이었다. 어려운 형편에 대학엔 못 보낼 터이니 일찌감치 실업계 고등학교에 보내 취업을 시킬 요량이었다. 학교에 갔더니 정기 담임선생님이 정기가 종이 상자로 만들었다는 기와집을 보여주었다.

이것 좀 보세요. 정기 솜씨가 이렇게 좋습니다. 어머니.”

전기과보다는 정기의 적성에 맞는 건축과에 보내면 좋겠습니다.”

정기가 만들었다는 기와집은 꽤나 정교했다. 솔방울의 비늘모양 돌기를 떼어내 기와지붕을 만들었다. 그것은 영락없는 멋진 기와집이었다. 귀산마을 오두막에서 자란 정기는 맘속에 늘 기와집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기는 내심 건축과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엄마, 내가 크면 멋진 기와집 지어주께에.”

문득 정기가 여섯 살 때 했던 말이 생각났다. 담임선생님의 말에 덕임의 마음이 잠시 흔들렸다. 선택의 기로, 양가랭이재에서 어느 쪽 길을 택해야 좋을지. 그래 지가 좋아하는 걸 하게 하는 것이 좋겠지. 아냐. 전기과를 나와서 지 작은아버지들처럼 한전에 취직해서 빨리 돈 벌어야 해. 망설임은 잠시 학교에 오기 전부터 이미 답을 정해 놓았었다. 시아주버니 둘이 한전에 근무하고 있었고 제법 넉넉하게 살고 있었다. 아들 정기도 지 작은아버지들의 길을 따라가길 바랐다. 그 길이 최선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엄마. 나 선생님 말씀처럼 건축과로 가까?”

아니. 전기과로 가야 니 졸업하고 직장에 빨리 들어간다이.”

부모의 말을 한 번도 거역한 일이 없는 고분고분한 아이였다. 그런 연유로 광주공고 전기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영문도 모르게

 

 

덕임은 아홉 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여순사건 때 끌려가 이유도 영문도 모르게 죽임 당하였다. 서른다섯에 홀로 된 엄마는 살길이 막막하였다. 야속한 세월, 수년을 눈물로 살다가 어린 덕임을 데리고 재혼을 했다. 엄마는 의붓아버지와 자고 덕임은 방 한쪽에서 잠을 잤다. 그때 덕임은 엄마 같은 사람 안 될 거야. 한번 시집가면 그 집에서 죽겠다고 맹세하였다. 남편은 술버릇이 좋지 않았다. 술만 먹으면 덕임을 두들겨 패고 머리채를 잡아 온 방으로 끌고 다녔다. 이유도 영문도 모르고 맞아 죽은 아버지 생각을 하며 울었다. 사흘이 멀다 하고 술만 먹으면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때마다 육 남매 어린아이들은 지들끼리 보듬고 방귀석지에서 숨죽여 울었다.

술만 처묵으먼 저렇게 염병하고 뚜드러 패고 멀크댕이 끌고 댕길 거인디 어찌 살아?”

허구헌 날 그라고 뚜드러 맞음서 어찌게 산가?” “존일에 나가부러.”

덕임이 동네사람들의 권유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 때문이었다. 덕임은 죽어도 여기서 죽으리라 다짐하며 고달픈 날을 견디었다.

별의별 장시를 다하고 댕김서 그것도 팔았지? 시발년.”

 

명곤이 욕지거리를 하며 우악스럽게 덕임의 머리채를 잡아 팽개쳤다. 덕임은 강동댁을 따라 멀리까지 장사를 나간 때도 있었다. 그런 날엔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남의 집에서 자고 올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런 일로 오해를 하고 있는 듯하였다. 어려운 살림에 보탬이 될까 하여 강동댁을 따라나선 터인데 그런 일 없다 해도 막무가내였다. 덕임은 서글프고 억울하였다. 한동안 머리채를 끌고 다니며 때리다 지친 명곤은 이내 골아 떨어졌다. 아이들도 지들끼리 보듬고 울다가 구석에서 잠이 들었다. 이렇게 사느니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덕임은 잠든 아이들 얼굴을 하나하나 쓰다듬었다.

느그 아부지는 저렇게 생겼어도 느그들은 자랑스럽게 잘 커라 잉.”

속으로 되뇌었다. 상기야. 종숙아. 재숙아. 인기야. 정기야. 우리 막내딸 정숙아 미안하다. 엄마가 미안하다. 흐르는 눈물 훔치며 잠든 아이들의 짠한 얼굴을 눈에 담고 또 담았다. 죄 없는 아이들이 눈에 밟혔지만 이 고통에서 속히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덕임은 마을 앞 들 가운데 있는 둠벙을 향해 걸었다. 세상에서의 마지막 밤, 보름달이 덕임을 따라오며 길을 밝혀주었다. 마음을 굳게 먹으니 흐르던 눈물도 말랐다. 둠벙을 향해 가는 길에 돌멩이를 치마에 주워 담았다. 죽으려면 돌멩이를 싸 짊어지고 빠져야 한다는 소리를 어디선가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저수지 언저리에 다 달았다.

느그 아부지가 그러고 생겼어도 느그들은 자랑스럽게 잘 커라 이.”

집에서 아이들과 하직할 때 속으로 했던 말을 다시 중얼거렸다. 둑에 서서 돌멩이를 싼 치마를 단단히 여몄다. 이제는 끝이라 생각하며 숨을 한 번 크게 쉬고는 둠벙 속을 내려다보았다. 물속에 아이들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엄마! 엄마!” “엄마 아~”

어디선가 아이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마을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움켜잡은 손에 힘이 풀렸다. 치마 자락에 담겨 있던 돌들이 순식간에 둠벙으로 빠져들었다. 죽는 것도 맘대로 되지 않았다.

 

 

 

서방 좀 빌려 줄랑가?

 

 

수년 전에 남편과 사별한 과부 보리실댁이 한 동네에 살고 있었다. 여름이면 동네 여인네들이 품앗이로 길쌈을 했다. 삼베를 짜기 위해서는 단계별로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한다. 먼저 삼을 삼굿에 쪄서 껍질을 벗긴다. 그 삼 껍질을 한 움큼씩 묶어 볕에 말렸다. 길쌈할 때는 아낙네들이 방안에 빙 둘러앉아서 삼을 삼았다. 가늘게 짼 삼을 허벅지에 대고 비벼 꼬아 길게 삼실을 만들었다. 고단한 길쌈, 때로는 야한 농담도 주고받으며 깔깔거렸다. 그 보리실댁이 덕임에게 야한 농을 하였다.

나 혼자 싼께 남자 생각이 나서 죽것네. 자네 서방 좀 빌려 줄랑가?”

아이고 그 먼 소리당가? 남사시럽게.”

농인지 진담인지 보리실댁이 종종 푸념처럼 내뱉던 말이었지만 그날은 덕임에게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오죽하면 저런 말을 할까? 싶기도 하고 이 여자를 한 번 남편에게 붙여줘 볼까도 생각했다. 덕임의 남편은 술만 취하면 덕임을 두들겨 패는 못된 술버릇이 있었다. 덕임은 보리실댁의 말대로 남편을 빌려주면 때리지 않고 좀 잘해 주겠지. 한 번 그래 볼까 생각했다. 그래서 남편에게 넌지시 그 말을 건네 보았다.

아이 저 건네 보리실떡이 서방을 쪼까 빌려주라 하네.”

그 개 같은 년이 나를 미친개로 아네? 그 여자가 나를 오라 그래야?”

혼자 산께 그것 숭이 아니여. 우리 새끼들도 모르고 그 집 새끼들도 모르게 한 번썩 가주씨요.”

그라먼 나 거그 가도 되겄냐?”

괜잖해. 일도 없어. 그 집 애기덜 눈에 안 보이게만 해.”

그리고 이튼 날 밤이었다. 삼을 삼고 집에 와 보니 남편이 양치질을 하고 속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참말로 보리실댁에 가려나보다 싶었다.

나가 한 번 갔다 오까?”

동네 사람들도 보믄 안 된께 비밀로 갔다 와. 그러고 나한테 잘해.”

덕임은 남편에게 그렇게 해주면 그 못된 술버릇이 고쳐질 줄 알았다. 명곤이 그 보리실댁과 천리장성을 쌓을지 만리장성을 쌓을지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오직 덕임을 때리지 않고 잘해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명곤은 참인지 변명인지 보리실댁 집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덕임에게 털어놓았다.

그 여자가 옷을 할랑 벗고 나를 보듬고 핥은디 징그러워서 못 보것듬마. 그래갖고 기냥 와불었어.”

놈의 여자는 딴 여자하고 말만 섞어도 질투를 한단디 당신은 대체 뭣한 사람이여?”

당신 정신 나간 사람 아니여?”

그렇게 생각해도 괜찮해. 나한테만 잘해줘.”

나한테만 잘해주길 바래. 술 묵으믄 나 잔 때리지 말고 존일에.”

 

 

 

내가 아들을 죽여 부렀어

 

 

어느덧 셋째 아들 정기가 광주공고 전기과를 졸업하였다. 곧바로 지원하여 입대하였다. 군복무를 마치고 빨리 취업하리란 속셈이었다. 군대에서도 정기는 광주공고 전기과 출신다운 실력을 보여주었다. 복잡하게 얽힌 전선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잘 정비하였다. 그리하여 상관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정기가 군복무를 마쳐갈 무렵이었다. 부대에서 정기의 부모님을 초청하였다. 부대장은 정기의 군 생활 중 이러저러한 일에 대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염정기 병장이 재능이 뛰어나니 군에 더 있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시쳇말로 군대에 말뚝을 박으라는 이야기였다. 그 물음에 정기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전기과로 진로를 정해 줬던 것처럼 이번에도 덕임이 나섰다.

우리 아들을 잘 봐주셔서 고마운디요. 군대만 있다가 사회에 나오먼 뭣을 해묵고 살 것이요?”

군대도 봉급이 사회의 웬만한 직장보다 높습니다.”

부대장의 말이었다. 정기는 부모님 의견에 따르겠다고 했고 그 말을 듣고도 정기 아버지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아무튼 우리 정기를 제대 시케 주씨요.”

덕임의 뜻은 단호했다.

어머님의 뜻이 정 그러시면 어쩌겠습니까. 제대시켜드리겠습니다.”

부대장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덕임의 뜻대로 하겠노라 했다.

우리 애기들 여섯 중에 그 거이 눈깔이여.”

말도 조리 있게 잘하고 애기가 그렇게 잘생겼어.”

정기가 군대에서 제대하고 집으로 왔다.

할머니랑 아버지 어머니 방에 들어가 앉으세요!”

그러더니 할머니께 봉투를 드리고 아버지 어머니에게도 따로따로 봉투를 드렸다. 막내 누이의 청바지까지 사 왔다. 정기는 담배와 술을 하지 않았다. 군대에서 주는 봉급도 절약하여 모았다고 했다. 그리하여 따로따로 용돈 봉투를 드린 것이었다.

없는 가정에서 저를 이렇게 잘 키워주셔서 군대생활 잘 마치고 왔습니다.”

제가 열심히 돈 벌어서 엄마 아빠 호강시켜 드릴게요.”

그러면서 할머니와 엄마 아빠를 아랫목에 앉혀놓고 큰절을 하는 것이었다. 형들이 둘이나 군대를 갔다 왔어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정기는 엄마의 바람대로 제대하자마자 한전에 들어가 근무하게 되었다. 그런데 직장에 들어간 지 일주일 만에 사고를 당하였다. 청천벽력이었다. 29층에선가 전선을 연결하고 내려오다 변압기를 잘못 밟아 추락했다는 것이었다. 정기 아버지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져 버렸다.

오메 내가 우리 아들을 주게 불었네~ 우리 아들을 내가 죽였어

덕임은 실성한 듯 울부짖었다. 급하게 택시를 불러 전대병원에 도착해 보니 정기는 피범벅이 되어 누워있었고 침상 밑으로 피가 흥건하였다. 아들의 죽음을 목도한 정기 아버지는 충격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산소마스크를 쓰고 병상에 있다가 그 길로 아들 따라 먼 길 떠났다. 명곤은 50년의 생을 그렇게 마감하였다. 서울에 있던 큰아들 종기는 소식을 듣고 내려왔다가 아버지와 동생의 초상을 치르고는 어디론가 떠나 버리고 소식도 없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막내딸도 집을 나가버렸다. 그 충격으로 시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남편 염명곤과 아들이 묻혀있는 동소산에 모셨다. 이웃 아주머니들은 자정 무렵까지 덕임과 함께 있다 돌아가곤 했다. 이럴 때일수록 혼자 있으면 안 된다며 덕임의 슬픔을 위로하였다. 혹여 덕임이 딴 맘먹을까 염려해서였다. 이웃 아주머니들이 돌아가고 나면 덕임은 동소산에 있는 아들 묘를 찾아갔다. 산속에서 밤새 울고 쥐 뜯고 헤매었다.

오메 오메 우리 식구 다 어디로 가불었냐고?”

아들 정기에 남편까지 죽어서 초상 치른 지 얼마 안 되어 시어머니 돌아가시고 큰아들은 행방불명에 막내딸은 가출해 버렸으니 이를 어쩌랴? 밤새도록 산속을 헤매다 동이 터서야 집에 돌아왔다.

덕임은 이혼한 둘째 딸 재숙이 낳은 딸 손주 하나를 키우고 있었다. 그 손주가 궁둥이를 치켜들고 엎드려 울다 잠들어 있었다. 내 사는 꼴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기가 막혔다.

아이고 내 팔자야. 내가 뭔 죄가 많해서 이라까?”

동네 사람들 우리 식구 다 어디 갔는지 봤오?”

동구 밖에 나가 악을 쓰면 개가 월월월 짖었다. 악을 쓰다가 중얼거리다가 그러고 집에 돌아와서 보면 온몸과 옷이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나 같은 사람은 죄가 많응께 이른 일을 당했제.” “아이고~ 아이고 내가 미쳤제.”

할머니~ 할머니는 왜 혼자 말을 해?”

할머니는 왜 뭐라고 뭐라고 나는 알도 못하는 소리를 해.”

그래. 너 크먼 내가 갈쳐 주께.“

지금 갈쳐줘 할머니.”

후제 갈쳐 주께.”

 

 

 

엄마 엄마 우리 엄마

 

 

우리 정기 그것을 놓쳐 불고는 좋고 즐거운 것이 한나도 없어.”

지 또래들을 보먼 우리 아들도 저 정도는 될 것인디 싶어서 속이 씨레.”

다른 아들이 둘이나 있어도 그거이 아니여.”

내가 아들을 죽어 불었어.”

평생을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아온 생애였다. TV를 보다가도 눈물이 나 우울증인가 싶었다. 이웃들은 사람 모인 데로 와야 산다고 했다. 왜 혼자 그러고 앉았느냐고 말들 하지만 사람 모인 데로 가도 달라질 게 없었다. 자기네들은 즐거워서 웃고 떠들어도 덕임은 즐겁지 않았다. 아니 즐거워할 수가 없었다. 이웃 친구들이 관광을 가자고 해도 뭔 재미로 놀러 갈 것인가? 아들의 적성 따라 건축과로 보냈더라면, 부대장의 권유대로 군대에 말뚝을 박게 했더라면 하는 회한으로 늘 괴로웠다. 스물셋 생때같은 아들을 잃고 33, 가슴앓이 하며 살던 덕임은 올해 팔십 다섯이 되었다.

 

문화 600 인생한컷은 어르신들의 사진을 찍어 거기에 인생이야기를 담아드리는 보성군특화사업이다. 임덕임의 인생이야기는 참으로 기구하였다. 덕임은 그동안 가슴에 묻고 살아온 사연을 토로하니 조금은 홀가분하다 하였다. 아들을 떠나보내고 나서야 덕임은 깨달았다. 아들의 길을 열어 준다는 것이 오히려 앞길을 막아서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한 효자 정기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엄마 엄마 우리 엄마 아들 맘 아시지요?

엄마가 슬퍼하면 이 아들도 슬퍼요.

엄마 울면 나도 울고 엄마 웃어야 나도 웃어요.

엄마 탓 아니어요 알잖아요. 내 마음

호강시켜 드린단 말 못 지켜서 미안해요.

엄마 엄마 우리 엄마 이제는 자책 말고

행복하게 사세요. 엄마 맘 편해야 내 마음도 편해요.

부디 아들 맘 헤아려 웃어 주세요. 엄마.

 

부디 이 아들의 마음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께 전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