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나비의 꿈

참빛사랑 2015. 9. 18. 11:11


나비의 꿈 (시가 흐르는 행복학교 소설 과제)

 

김현호

  

가을 하늘이 유달산을 품고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아침 아홉 시, 제주행 씨스타크루즈호는 뱃고동을 울리며 하늘같이 평온한 바다 위를 서서히 날기 시작했다. 천 사백여 명이 정원인 24천 톤급 여객선이 어찌 날겠는가만 아무튼 기분은 그랬다. 삼학도 고하도를 뒤로하고 섬들을 지나 아름다운 섬 제주를 향해 망망대해로 미끄러져 갔다. 12일 동안의 프로사진협회 전남지회 연수대회를 위해 떠나는 가을여행이다. 잔잔한 바다는 더없이 평화로웠다. 점점이 떠 있는 섬과 크고 작은 배들이 이따금 스쳐 지나갔다.

선실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다가 갑판으로 나와서 푸른 하늘과 섬들을 바라다보기도 하고 하늘에 떠있는 멋진 구름을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넘실대는 바다를 바라보다가 문득 세월호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그 후 일 년이 훨씬 지났는데 해결되거나 진상이 밝혀진 게 별로 없는 것 같아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기억하자고 잊지 말자고 다짐하며 매달았던 팽목항의 노란 리본들, 노랑나비 떼의 군무같이 나부끼던 맹세, 416의 그 울분과 진실은 아직 인양되지 못하고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다. 수학여행 길이었던 그때 그 아이들도 마냥 즐거웠을 텐데...

이런저런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너덧 시간의 긴 항해 끝에 여객선은 제주항에 도착했다.

 

항구에 도착하기 전까지 줄곧 맑고 푸르던 그 하늘은 금세 사라지고 삐진 사돈 같은 구름이 잔뜩 껴 있다.

아침에 목포에서의 날씨가 맑고 푸른 전형적인 가을 날씨여서 제주의 이런 날씨는 예상 밖이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내일 새벽으로 예정된 누드촬영대회를 앞당기기로 했다. 내일 새벽에 비가 내릴 것을 염려해서다.

우리는 관광버스를 타고 50여 분을 달려 섬의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금방이라도 빗방울을 떨굴 것 같던 하늘은 이내 상당히 밝아졌다. 이윽고 오설록 차밭을 지나 목적지인 비밀의 정원에 도착했다. 이곳은 6천 평 규모의 정원인데 웨딩촬영을 주로 하는 곳으로 CF 촬영이나 유명 연예인들의 화보 촬영이 빈번한 곳이라고 했다. 초입엔 카페가 있고 세상에서 가장 작은 포니종() 조랑말 한 마리가 매여 있다. 그 옆엔 새끼돼지만 한 크기의 미니 돼지 세 마리가 나지막한 우리에 갇혀 이리저리 나대고 있었다. 비밀의 정원 한 쪽엔 캐러밴이 띄엄띄엄 누워 있었다. 우리 일행은 카메라를 챙겨 들고 비밀의 정원이라 새겨진 표지 석을 배경으로 모델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어서 비밀의 정원에서 촬영이 시작되었다. 초입에 매어 있던 조랑말도 잠깐 동안 모델이 되었다. 주인의 손에 끌려 온 조랑말은 처음엔 쑥스러운지 자꾸 뒷걸음질을 치더니 나중엔 누드모델과 함께 포즈를 곧잘 취했다. 이 조랑말은 간밤에 용꿈을 꾼 게 틀림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애마부인의 애마도 아닌 네가 평생에 그런 호사를 누릴 수가 있었겠어?

 

신이 창조한 피조물 중 최고의 걸작인 여체.

옛날 선배 사진작가들은 누드사진 촬영에 애로사항이 많았다. 사회적 인식도 인식이려니와 누드모델 구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으리라. 지금은 누드모델협회가 있어 모델 섭외가 수월하고 전문적인 훈련으로 포즈를 곧잘 취하니 촬영에만 열중하면 좋은 작품이 될 터이다.

사진은 빛으로 그리는 그림이다. 빛이 없으면 그릴 수 없는 그림인 셈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세기 13~5) 하나님은 태초에 만드신 그 빛을 삼라만상에 비추어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풍경을 연출하신다.

빛을 만드신 창조주의 연출로 아름다운 풍광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찬스를 잡아 셔터를 누르는 것이 풍경사진이라면 누드사진은 작가와 모델이 함께 만드는 합작, 콜라보레이션의 산물이다. 작가의 기량과 감각이 제아무리 뛰어나도 모델과의 예술적 교감이 없다면 좋은 작품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옅은 구름에 부드럽게 걸러진 탐라의 가을빛이 여체의 알몸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봉긋한 젖가슴은 제주의 오름처럼 탐스러웠고 근래에 보기 드문 유려한 몸매에 작가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다. 모델에 대한 칭찬과 배려는 좋은 작품을 만드는 지름길이다. 그래서 모델에 대한 무례한 언사나 무리한 요구는 금물이다. 전문 모델로서의 자긍심과 예의를 지켜줘야 함은 사진작가의 품위요 기본적인 덕목이다.

눕기도 하고 돌아 서기도 하며 모델은 자신의 미를 여러 가지 포즈로 표현하고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담는 것이다.

 

미끈한 곡선을 그리며 흐르는 매혹적인 뒤태. 엉덩이 한쪽엔 나비 문신이 상표인양 앙증맞게 붙어 있었다. , 나비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엉덩이에 앉아있던 나비가 천천히 날개를 오므렸다가 폈다. 간지러운지 그녀는 엉덩이를 살짝 흔들었다. 나비가 화들짝 놀라 날아올랐다가 엉덩이에 다시 내려앉았다. 나비는 날개를 접고 꿀을 찾아 헤매듯 이리저리 기어 다녔다. 그녀는 더 세게 엉덩이를 흔들어댔다. 그녀의 탐스러운 젖가슴도 덩달아 춤을 췄다. 나비는 다시 날아올라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나는 순간 황홀한 전율에 휩싸였다. 주변이 밤처럼 어두워지고 음이 소거된 TV 화면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비가 그녀 주위를 돌며 날개를 나풀거릴 때마다 별들이 쏟아져 내렸다. ! 눈부시다. 탱탱한 긴장감이 솟구쳐 올랐다. 순간 나는 호수처럼 잔잔하던 바다를 떠올렸다. 한라산의 높이는 1950미터, 백록담, 구상나무, 돌하르방, 서귀포, 성산포……. 본능을 잠재우기 위해 나는 이런 엉뚱한 자장가를 소리 없이 불렀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나비를 주제로 한 시가 흐르는 행복학교 과제물을 써야 하는데 마땅한 이야깃거리를 찾지 못하고 있던 차에 나는 뜻밖에 제주에서 나비를 만났다.

연중 서너 차례 누드촬영을 하면서 국내외의 수많은 모델을 보아왔다. 과거에는 국내 모델이 절대다수였지만 최근엔 희고 매끈한 피부를 가진 파란 눈의 러시아 모델도 많이 접하게 된다. 요즘 누드모델들에게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는 외국 모델로부터 시작된 민둥산 바람이, 빠르게 국내모델로 번져갔다는 것이다. 그것이 요즘의 유행인지는 몰라도 수풀이 사라져 골짜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삭막함에 나는 그 민둥산이 내심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남의 산에 나무를 심어라 풀을 심어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화산암 구릉의 원시림 곶자왈에 굽이굽이 오솔길을 낸 비밀의 정원 안엔 갖가지 수목들이 자라고 있고 그 나무줄기를 타고 마삭줄 넝쿨이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비밀의 정원엔 수풀과 나무, 자연이 더불어 살고 있다. 용담, 씀바귀, 쑥부쟁이 등 가을 야생화는 곳곳에서 벌 나비를 유혹하고 그 자연 속에서 태초의 모습으로 포즈를 취하는 여인. ! 작품이다. 애벌레가 탈피하여 나비가 되듯 옷을 벗어 버린 저 여인도 멋진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나는 꿈을 꾸겠지. “하필 누드모델이야.”라며 멸시하는 이들에게 나비는 해줄 말이 있으리라. “명품 의상 속에 감춰진 너의 몸은 세월 따라 늙어 흙으로 돌아갈 지라도 내 청춘 나의 이 아름다운 몸매는 사진으로 기록되어 작품으로 남는다.”라고...

 

가식의 옷을 벗어 버릴 때 사람은 비로소 사람이 된다. 우리 일행은 촬영을 마치고 숙소에 들었다. 탐라의 밤이 지나고 가을비 내리는 아침, 나비는 우리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젖은 날개를 털며 뭍으로 날아갔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예은   (0) 2016.07.05
제6회 보성벚꽃축제 2016  (0) 2016.03.24
하몽(夏夢)  (0) 2015.09.06
보성군 58무술생 한마음대회 2015.8.22. 보성중학교 봉화관  (0) 2015.08.22
2015 두마리 토끼를 잡다  (0) 2015.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