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득음정에서 소리를 얻다

참빛사랑 2017. 6. 10. 15:26



득음정에서 소리를 얻다

 

득음정에 가보기로 했다.

시가흐르는행복학교 논어 읽기 수업을 마치고 열 한 명이 봇재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김은수 교수님, 잘 먹었습니다. 식후에 우리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득음정으로 향했다.

 

승용차 두 대에 나눠 타고 봇재를 지나는 18번국도 아래 숨은 골(은곡隱谷) 굽잇길을 따라 내려갔다. 녹음이 짙어가는 유월의 초목 우듬지에 지는 햇살이 걸려 곱게 빛나고 있다. 길가엔 금계국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산밤나무 꽃향기가 열린 차창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이윽고 영천저수지가 눈에 들어왔다. 양동마을 앞을 지나 영천저수지를 끼고 돌아 득음정이 있는 영천 계곡을 따라 올라갔다.

 

한 참을 올라가니 칡넝쿨이 길을 가로질러 치렁치렁 매달려 있었다. 순간 나는 레이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랑신부가 오색테이프 뒤집어쓰고 행진하듯 우리는 칡넝쿨 레이스를 뚫고 지났다. 칡잎파리가 넝쿨째 차창을 스치며 지나갔다.

간이화장실이 있는 곳에 차를 세워두고 득음정을 만나러 갔다. 작은 폭포를 이루며 흘러내리는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소릿길 따라 올라가면 징검다리가 놓여 있다.

징검다리를 건너 조금 더 오르면 득음정이다. 단청장식을 한 아담한 정자가 눈에 들어오고 쏴아~ 폭포물소리 들린다.

 

정자 뒤로 폭포가 있는데 유수한 명창들이 이 폭포소리를 들으며 소리공부를 했다고 한다.

득음폭포 위쪽 계곡으로 좀 더 올라가면 허궁다리에 이르는데 더 가면 보성강 발원지 비래천이 있는 웅치면 삼수 마을이 나온다. 일제 강점기에 허궁다리에 규모가 작은 수력발전소가 있었다.

지금도 수문 같은 콘크리트 구조물이 부서진 체 남아 있다. 필자는 이 허궁다리와 관련한 특별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지금으로 부터 30년 쯤 전의 일이다. 안경은 잃어버렸지만 대신 엄청나게 좋은 걸 얻은 사연은 아래쪽에 있다.

 

우리 일행은 돌아가며 창을 하거나 시를 낭송하거나 노래를 불렀다. 조오타를 연발하며 시간가는 줄 모르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득음정에서 득음한 우리는 내친김에 소리성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다도락 다원이 있는 영천저수지를 지나 도강마을 소리성지에 도착했다.

예고 없이 방문한 길인데 마침 한정아 명창이 일행을 반겨 주었다. 정응민 선생의 생가 등 소리성지 곳곳을 두루 살펴보았다.

 

정응민 선생 생가와 판소리 예술관(성창순 명창이 사재를 털어 지은 곳) 사이에 지난 15일 작고하신 성창순 명창의 묘가 있다. 하얀 조약돌이 깔린 검은 상석아래 명창이 잠들어 있다.

이곳은 성창순 명창이 정응민 선생에게서 소리를 배우던 마을이다. 성창순 명창은 훌륭한 국악인이기에 앞서 마음이 참 따뜻한 분으로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분이다. 그 무렵 쓴 졸시 한 편.

 

 

도강에 묻힌 소리

 

 

애광 김현호

 

 

바람이 분다

인당수엔 더한 풍랑 휘돌았겠지

치맛자락처럼 펄럭이는 만장

흐느낌 여기저기

바람결에 날린다

 

대숲이 운다

 

북바위 두드리며

소리 공부하던 이곳

사재 털어 집 짓고

오래오래 사시나 했더니

느닷없이 별이 되어

판소리 거룩한 땅

도강에 안기셨다

 

송나라 원풍 말년에 황주 도화동 사는 봉사 한 사람이 사는디

성은 심가요 이름은 학규라 누대 명문거족으로 명성이 자자 터니...

 

걸쭉한 아니리에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진양조로 이어지고

장단마다 희로애락 질펀히 묻어나는 심청가

청이 효심 절절히 흐르는데

 

으로 육성으론 다시 들을 수 없는

을 남기고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곳

리 따라 흙으로 가시다

 

창은 가셨지만

은 남아 강산에 흐르리 흐르리.

 

 

 

*도강 : 전남 보성군 회천면 소리 성지 마을로 송계 정응민 선생의 생가가 있다.

*성창순(19342017. 1. 5.) 광주출생. 정응민, 박녹주, 김소희 등에게 사사하였으며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예능 보유자로 1977년 심청가를 완창한 이래 춘향가 흥보가 등도

수차례 완창해 내며 타계 전까지 왕성한 활동을 한 진정한 소리꾼이요, 마음이 따뜻한 분이었다.

소리 공부를 했던 도강마을에 수년 전, 판소리 예술관을 짓고 판소리 전수와 후학 양성에 매진했었다.

 

 

한정아 명창은 우리 일행을 창을 가르치는 방으로 안내했다.

보성문학회 이남섭 회장과는 절친한 사이여서 특별히 배려한 즉석 공연을 관람하는 호사를 누렸다.

공연이 끝나고 소리를 한 대목 배워보는 시간을 가졌다. 김형엽 시인의 소리를 들은 한 명창은 배우면 소리를 잘할 수 있는 목청이라 호평하였고 조영을 사무국장의 소리를 듣고는 조상현 국창의 문하에 들어가라 권하였다. 조상현 국창과 동향 인 영향도 있겠지만 아까 득음정에서 미리 득음한 까닭이 아닐까














 



































잃어버린 안경

 

 

평상시 시력이 좋았던 나는 졸업앨범 인쇄소 조판실에 근무하며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눈을 혹사한 탓인지, 군에 입대하고 논산훈련소에서 신체검사를 다시 받게 되었을 때 난시 판정을 받았다. 나뭇가지를 바라보면 2중으로 겹쳐 보였는데 그때부터 나는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좌로 굴러 우로 굴러, 낮은 포복 높은 포복 철조망 통과를 하며 훈련을 받을 때마다 흙먼지와 땀이 뒤범벅되어 안경알을 흐리게 하던 훈련병 시절, 안경은 나를 얼마나 불편하게 했던지…….


조선 시대 판소리 명창이었던 송계 정응민 선생의 생가가 있는 보성군 회천면 도강마을에서 영천 저수지 옆으로 다도락 다원을 지나서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길을 소리길이라 하는데 또랑또랑한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한참 오솔길을 걸어 올라가면 조상현, 조통달, 성창순 등 보성소리의 뛰어난 명창들이 득음 했다는 득음 폭포에 이르게 된다. 폭포 옆에는 득음정 이라는 정자가 대숲에 가려 있고 포말을 이루며 쏟아지는 폭포물은 정자를 감아 돌아 흐르고 흘러 영천 저수지에 합류한다. 피를 토하는 한의 소리가 폭포 소리를 잠재우고 득음정 소리길 따라 울려 퍼져야 득음의 경지에 이르고, 득음의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소리와 장단을 마음대로 갖고 놀 수 있다고 한다. 심청가, 춘향가, 적벽가, 수궁가, 흥보가, 판소리 다섯 마당, 혼을 흔드는 보성소리가 폭포 소리와 함께 이 계곡에 구성지게 울려 퍼졌으리라.


오래전, 여름의 끝자락 어느 주일 오후였다. 몇몇 교우들과 함께 영천계곡으로 바람을 쐬러 갔었다. 득음 폭포에서 오른쪽 비탈길을 따라 한참을 더 오르면 허궁다리가 있는데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소수력발전소가 있던 곳이다. 지대가 높은 웅치 삼수마을에서 흘러내린 물을 허궁다리에 보를 막아 가두어 발전기를 돌렸던 모양이었다. 그 물은 계곡을 따라 흐르다가 득음 폭포를 거쳐 영천 저수지로 흘러든다. 그곳에 물을 막았다 텄다 하는 수문 같은 콘크리트 구조물이 남아 있었는데 나는 그곳에 한 손을 올려놓은 체 무심코 계곡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일행 중 한 명이 어이, 벌집 있어 조심해!”라고 내게 말했다. 나는 얼른 주위를 살펴보았다. 상당히 큰 벌 몇 마리가 윙윙거리며 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고 내가 한 손을 올려놓고 있는 수문 안쪽 천정에는 보름달만 한 황토색 말벌집이 매달려 있었다. 거기엔 세끼 손가락 두 마디쯤 되는 벌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순간 나는 겁이 덜컥 났다. 벌초하다 벌에 쏘여 죽기도 한다는데…….


그러나 침착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천천히 그곳을 벗어나야 했다. 논산훈련소에서 신병교육 조교로부터 배웠던 정숙 보행을 이때 써먹을 줄이야. 정숙 보행이란 야간에 소리 나지 않게 걷는 걸음 법이다. 아주 조심스럽게 손을 서서히 움직이며 앞에 장애물이 없는지 살펴야 하고 발을 내디딜 때도 슬로우 모션을 해야 한다. 그러나 잔뜩 겁에 질려 있는 내가 정숙 보행을 제대로 했을 리 없다. 벌들이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뒤통수며 어깨 등판 가리지 않고 쏘아댔다. 이젠 정숙 보행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냅다 뛰기 시작했다. 십여 m쯤을 거시기 빠지게 달려 엉겁결에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벌들은 공습을 끝내고 제집으로 돌아갔을 것이지만, 나는 숨이 막혀 참을 수 없을 때 까지 물속에 잠겨 있어야 했다. 다행히 물은 그리 깊지 않았다. 설령 깊다고 해도 바닷가에서 자란 탓에 수영을 곧 잘하니 염려할 것은 아니었다. 가평에서 군 생활을 할 때도 폭이 오백 미터는 족히 되는 물살 센 북한강을 헤엄쳐 건너갔다 오지 않았던가


한참 만에 물속에서 나온 나는 일행과 함께 계곡을 따라 정신없이 산에서 내려왔다. 내려와서 보니 안경이 얼굴에 없었다. 벌을 피해 물속으로 도망갔을 때 그 물속에 빠뜨린 게 분명했다. 하지만 다시 그곳에 가 안경을 찾아올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길로 나는 집에 돌아와서 웃통을 벗고 엎드렸고 아내는 벌에 쏘인 곳에 안티푸라민을 발라주었다. 머리와 어깨 등판에 일고여덟 방을 쏘인 것 같다고 했다. 곳곳마다 벌겋게 부어올라 한 열흘 동안 꽤 고생했다. 병원에 가서 치료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여러 날이 지나니 찐빵 같이 부풀었던 손등과 온몸의 부기도 빠지고 예전의 내 모습으로 돌아왔다


허궁다리 물속에서 안경을 잃어버렸지만 궁핍한 살림 탓에 안경을 맞춰 쓰지 못하고 그냥저냥 지나왔었다. 당시엔 연필로 수정 하던 때였다. 디지털 시대로 넘어 오면서부터는 컴퓨터 화면에서 포토샵으로 수정 하지만, 그때는 연필심을 4센티 정도로 길게 깎아 사포로 바늘보다 더 날카롭게 갈아서, 수정용 니스를 바른 원판 뒷면에 직접 수정을 했다. 맨눈으로 수정하는 나를 보며 아내는 빨리 안경을 맞춰 줘야 하는데…….”하며 늘 안쓰러워했다. 그런데 안경을 쓰지 않고도 멀리 있는 간판의 작은 글씨가 잘 보이고 운전할 때 신호등이며 교통순경 아저씨가 잘 보였다. 2중으로 보이던 나뭇가지가 제대로 보이는 것이었다. 난시 때문에 안경을 써 왔는데 그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또 한 가지, 무거운 비디오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회갑이며 칠순 팔순 잔치 촬영을 온종일 하고 오면 2~3일은 어깨가 아파 아내가 주물러 주곤 했는데, 아무리 촬영을 오래 해도 어깨 아픈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벌에 쏘여 하마터면 죽을 뻔했고, 안경마저 잃어버리고 온몸이 팅팅 부어서 한 열흘 고생은 했지만, 헛고생은 아니었다. 사진과 영상 일을 하는 내게 눈이 보배이고, 튼튼한 어깨가 훌륭한 버팀목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렸다. 이 일로 인하여 시력을 회복했고 어깨가 튼실해졌으니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소중한 그 무엇을 얻은 셈이다.